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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 very long time)
edit: 2025.08.21
Flavio Del Santo&Nicolas Gisin의 Creative and geometric times in physics, mathematics, logic, and philosophy의 한국어 요약본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자각한다. 문학에서도 <시간이 펼쳐진다(unfold)>라거나 <시간이 흐른다(flow)>라는 식의 표현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무언가 시간에 실제로 변화하는 속성을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간은 정말 ‘흐르는’ 것인가?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시의 간격이다. 즉, 시간의 개념은 때의 간격을 측정하는 시계의 발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데 현대의 가장 성공적인 물리 이론들조차 시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현대 물리학은 시간의 특별한 역할을 축소시켜 왔다. 하지만 시간의 창조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 자연 법칙은 그 어떤 서술도 만족스러울 수 없다. 물리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근본적인 가정은 framework-level에서 물리학 이론이 결정론적인가 비결정론적인가에 따라 도출된다. 그 두 가지를 각각 기하학적 시간(GT)과 존재론적 시간(OT)이라고 부르자.
먼저, GT는 물리학의 결정론적 운동 방정식에 등장하는 매개변수적 시간이다. 이것은 세 개의 공간 차원과 함께 사건(event)을 지정하는 좌표의 역할만 해준다. 즉 GT는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4차원 블록 우주 안에서 위치짓기 위한 관계적 지표일 뿐이다. 따라서 그 속에는 실질적인 생성(becoming)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이미 촬영을 마친 필름은 틀기만 하면 전개되지만 그 안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 OT는 세계의 상태에 존재론적 불확정성(ontic indeterminacy)이 존재하여 어떤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가정할 때 비로소 등장하는 시간 개념이다. 보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OT에서는 세계에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실재할 가능성이 상정된다. OT 개념은 H. Bergson의 입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과 시간의 본성에 대해 논쟁한 것으로 알려진 철학자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그와 같은 철학자들의 해석을 못마땅해 했지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에 제네바의 필드하키 경기장의 날씨는 어떨까?”라는 과학적 질문을 상상해 보자.
(1) 공기와 수증기 등 관련된 모든 분자들의 운동 방정식을 이용하여 그 변화를 계산함으로써 한 달 뒤 제네바의 날씨를 예측한다.
(2) 정확히 한 달을 기다려 그 과정이 자연히 전개되도록 둔 다음, 한 달 뒤 제네바의 실제 날씨를 관측한다.
(3) 1주일 동안 추가 자료를 모은다. 혹은 그 1주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낸 뒤 나머지 기간 동안 계산을 시작한다.
여기서 핵심 질문을 하나 해보자. (1)과 (2)는 동일하고 유일한 하나의 시간 개념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 일단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위 날씨 예시처럼 복잡계를 다룰 때 특히 중요해지는 물리학의 근본적 해석들을 구분해 둘 필요가 있다. 표준적인 통설은 다음과 같다.
(i) 결정론적인 고전 물리학 모형: 각 상태는 모든 다른 가능한 상태들과 시간 전체에 걸쳐 일대일 대응된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시간은 운동 방정식에 등장하는 매개변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결정론은 다음의 두 가지 가정을 모두 충속시켜야 정당화된다. 첫째, 적절한 초기 조건이 주어졌을 때 해가 시간에 따라 유일하게 정해진다. 둘째, 초기 조건이 무한한 정밀도로 완전히 결정되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즉, 한 상태는 위상 공간 상의 무한소 크기의 한 점으로 표현된다.
(ii)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결정론적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되 실제로는 초기 조건을 무한 정밀도로 알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함: 이 관점은 주로 혼돈계에서 중요하다. 그 이유는 계의 향후 행동이 초기 조건의 극미한 숫자 자리값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초기 조건에 대한 지식이 부분적일 때 그와 양립 가능한 미래 상태들을 오직 통계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
(iii) 초기 조건(또는 계의 상태)이 애초에 무한한 정밀도로 결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자연에 존재론적 불확정성(ontic indeterminacy)이 존재한다는 전제다. 이 경우, 비록 운동 방정식 자체는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될지라도 계의 전개는 필연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게 되며 여러 개의 미래 상태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때 각 미래 상태에는 객관적인 경향성 또는 성향이 존재할 수도 있음) 즉, 존재론적 불확정성 자체가 근본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의 원인이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상태로 날씨 사례로 되돌아가 보자.
(1) : (i)
여기선 시간을 단지 어떤 변화의 좌표로 사용할 뿐이다. 가령 컴퓨터 계산을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 달 뒤 제네바의 맑은 날씨 같은 하나의 사건에 시간 좌표를 부여하는 식이다.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런 의미에서, GT에는 진정한 생성(becoming)이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 상태의 시간 좌표를 $t_0$라고 하고 우리가 알고 싶은 미래 상태의 시간 좌표를 $t_f$라고 하면, 계산 과정이 걸리는 시간을 $t_f - t_0$에 대응시키는 식이다. 여기서 GT 계산 과정은 보다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가속할 수 있다. 물리적인 비유를 하자면, 튜링 기계의 헤드가 테이프를 읽는 속도와 같다. 또 상대성이론의 시간 지연 효과를 이용하면 GT 구간을 물리적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 요컨대, 계산 시간 $t_f - t_0$와 실제 사건 사이의 대응은 다대일 함수가 될 수도 있다.
(2): (iii)
존재론적 불확정성이 있는 경우, 필연적이지 않은(non-necessary)물리 과정은 현재를 경계로 해서 미래를 과거와 실제로 갈라놓는 시간 개념을 수반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지식으로서 모르는 불확실성(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아니라 세계의 자유도(degree of freedom)에 객관적으로 새겨진 어떤 것이라는 물리주의적 관점에서의 정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가 창출되는 때는 필연적이지 않은 물리적 사건이 일어날 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관찰자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계의 상태가 순수하게 시스템에 관한 최대 정보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상태만으로는 이후의 진화를 완전히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개념이 바로 OT이다. 이것은 언어나 주관석 심리 과정 등과 전혀 관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따라서 이때의 사건에는 두 종류가 있게 된다. 하나는 필연적 사건(ex. 두 개의 기하학적 세계선이 교차할 때 일어나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비필연적 사건이다. 이런 현실화의 순간들이 객관적 현재를 결정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생성(becoming)이라는 현상이다. 결정론적인 계산이 한 달 동안 지속되며 그 결과로 $t_f$ 시점의 제네바 날씨가 도출된다. 원칙적으로는, 예측에 걸리는 계산 시간이 실제 현상을 관측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그냥 계산 결과가 나온 후에 실제 현상과 일관성을 확인하면 된다.
날씨에 대해 이런 미묘한 질문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 어느 때든) 제네바에 700일 연속 비가 올 때가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만약 날씨를 좌우하는 복잡계가 완전히 결정론적이라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전적으로 GT의 문제다. 다만 유한한 GT 내에 답이 결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컴퓨터로 역학계의 동역학을 계속 돌리다 보면 언젠가 “예, 있습니다”라는 답을 찾을 수도 있지만, 만약 찾지 못한다면 알고리즘은 영원히 종료되지 않고 탐색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OT가 작동하는 절차, 즉 한 달을 기다렸다가 실제로 날씨를 관측하는 방법은 결과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초기 상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일련의 비결정론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보가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상태와 최종 상태는 결정론적으로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관측된 결과와 양립 가능한 초기 상태들의 집합만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OT는 이전까지 불확정적이었던 물리 변수의 값들이 실제로 결정되는 사건, 즉 현실화(실현)가 발생할 때 필요해진다. 불확정한 상태가 결정된 상태로 바뀌는 과정ㅡ그리고 그에 수반되어 새로운 정보가 창출되는 과정ㅡ이 바로 이 “시간의 발생”을 가져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정보가 창조될 때마다 OT의 시계가 똑딱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수학에서 시간에 대해 논의하는 일은 흔치 않지만, 앞서 도입한 두 가지 시간 문제는 수학에서 거의 완벽한 상대 개념을 갖는다. 이제 전형적인 수학적 대상을 하나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실수를 떠올려 보자. 사실 수학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실수들은 계산이 불가능하다. 이들 숫자 각각에 대해 모든 자릿수를 출력해 내는 유한한 명령으로 구성된 목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콜모고로프 복잡도(Kolmogorov complexity)가 무한대인 수들이다. 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실수의 전형적인 예로 드는 수들ㅡ예컨대 $\sqrt{2}$나 $\pi$ㅡ은 모두 계산 가능한 실수들이다(정사각형의 대각선과 한 변의 비율은 그 모든 자리수를 출력하는 간단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원주율 $\pi$ 역시 원 둘레와 지름의 비율로서 모든 자릿수를 산출하는 알고리즘이 있다). 물론 모든 유리수들도 계산 가능하다. 유리수는 유한한 소수 표현으로 직접 쓸 수 있거나(또는 순환마디를 가져) 유한한 문자열로 압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을 바라보는 표준적인 방식, 이른바 고전 수학은 하나의 플라톤주의 형태다. 여기서는 다른 수학적 존재들과 더불어 실수들도 그 무한한 자리수를 모두 갖춘 채 실재한다고 전제한다. 다만 그 모든 실수를 레이블링하거나 파악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를 생성해줄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적 플라톤주의 수학은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 언어이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학을 과학의 언어로 승격시켜 물리적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할 때 문제가 드러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구성주의(constructive mathematics)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관주의(Intuitionism)다. 이 접근에서는 수학적 존재가 처음부터 완전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실수의 무한 소수 전개도 처음부터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숫자들이 순차적으로 하나씩 창조되어 나오는 식이다). 직관주의 수학의 창시자인 L. E. J. Brouwer는 창조적 주체(creative subject)를 상정하였다. 이는 예컨대 한 계산 불가능한 실수의 각 자리 숫자를 이상화된 정신(수학자)이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는 과정을 담당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몇몇 저자들은 이 창조적 주체라는 개념의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예를 들어 true random number generator에 의해 전형적인 실수의 자리들이 생성된다는 아이디어가 제안된 바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자리가 매번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난다기보다는, 새로 얻어지는 정보가 직관주의적 실수의 불확정성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킨다는 의미다. 즉,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비트 하나를 결정된 비트로 바꾸어 놓는 물리적 과정에 의해 새로운 정보가 한 조각씩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직관주의는 객관적(objective) 또는 자연주의적(naturalistic) 직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식에서는 전형적인 실수들도 손에 잡히는 개념으로 바뀌며, 곧 OT와 직접 연결되는 개념이 된다. 즉 시제가 있는(tensed) 수학적 언어라고 볼 수 있다.
계산 가능한 실수를 생각할 때에는 GT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들 숫자에 대한 모든 정보는 그것을 규정하는 (유한한 길이의) 알고리즘, 다시 말해 그 초기 조건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실수의 43,800번째 자릿값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하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해당 실수의 자릿수를 출력하는 알고리즘을 실행해서 43,800번째 숫자를 뽑아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앞선 자리들을 다 계산하지 않고서도 43,800번째 자리를 바로 계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어떤 특정 위치의 자릿수를 곧바로 계산하는 digit-extraction algorithm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pi$의 $n$번째 16진수를 직접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Bailey-Borwein-Plouffe formula가 잘 알려져 있다(10진법에 대해서도 이런 알고리즘들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계산 가능한 (무리)수가 이미 완전히 결정되어 있어서 OT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추가 증거로 볼 수 있다. 요점은, 이와 같은 문제의 답이 결정론적인 결과로 얻어지기 때문에 해당 알고리즘 자체에 모든 답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알고리즘은 빠르든 느리든 실행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수학적 GT를 마음대로 조작(manipulate)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전형적인 실수, 즉 계산 불가능한 실수를 생각해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수에 담긴 정보를 압축해 담을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유일한 알고리즘”은 그 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다음 자리수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연적 난수 생성 과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실수의 43,800번째 자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43,800번에 걸쳐 “다음 자리 생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수학적 OT를 요구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숫자의 자릿수에서 7이 700번 연속 등장하는 경우가 있을까?”라는 류의 질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숫자 7이 700번 연속 나타나는” 예시는 C. Posy의 논의에서 빌려온 것이다. 만약 해당 숫자가 계산 불가능한 실수라면, 기다려서 확인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계산 가능한 실수 (예: $\pi$)라 하더라도 이 질문은 흥미롭다. 상황은 앞선 날씨 사례와 비슷하다. 하지만 수학은 공리적 체계이므로 이 질문의 해결이 더 명확해진다.
이에 대한 두 가지 프로그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날씨 사례에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 즉 숫자 $\pi$의 자릿수를 훑으면서 “7이 700번 연속 등장하는지”를 systematic하게 찾는 검색 프로그램이다. 두 번째는 페아노 산술(Peano arithmetic) 내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모든 정리를 차례로 출력하되, 해당 명제(“7이 700번 연속으로 등장한다”는 추측)의 부정을 찾아내면 출력을 멈추도록 설계하는 프로그램이다. 만약 그 명제가 참이라면 첫 번째 프로그램은 결국 700개의 7이 연달아 나오는 위치를 찾아서 유한한 (기하학적) 시간 내에 멈출 것이다. 만약 그 명제가 페아노 산술 내에서 증명 가능하다면, 두 번째 프로그램이 역시 유한한 (아마도 엄청난) GT를 거친 후 멈출 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프로그램 모두 끝없이 멈추지 않고 돌기만 한다면, 해당 명제는 거짓이지만(첫 번째 프로그램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페아노 산술 내에서는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째 프로그램도 멈추지 않았으므로). 완전성을 위해 덧붙이자면, 논리적으로는 네 번째 경우도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멈추는 경우인데, 이는 페아노 산술이 모순적임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이 경우가 바로 괴델의 유명한 정리의 한 예다.)
물론 수학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돌리지는 않고 직관적 창의력을 동원하여 명제를 분석할 지름길을 찾는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OT을 사용하는 셈이다. 날씨 사례로 돌아가 보면, 시스템이 계산 불가능한 실수처럼 비결정론적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 역시 기다려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날씨 변화 방정식과 완전히 결정된 초기 조건을 신뢰한다면, 계산 가능한 실수의 경우처럼 앞서 언급한 두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절차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초기 조건들을 유한한 알고리즘으로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그것을 담을 컴퓨터는 유한해야 하므로) 가정하는 셈이다.
인정할 만한 부분은, 수학에서 GT와 OT를 구분하는 본문의 견해는 직관주의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C. Posy나 M. M. van Atten 등의 직관주의자들은 계산 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실수가 새로운 정보의 생성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고 본다.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실수가 OT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앞서 물리학과 수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OT는 비결정론으로부터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정보가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있을 때 비로소 OT가 의미를 가진다. 즉 불확정성을 줄여가는 과정이 가능할 때 비로소 OT가 등장한다는 뜻이다. 말인즉슨 물리적 속성에 대한 명제를 생각하고 그 논리적 구조를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고전 논리(classical logic)에서는 두 가지 주요 원리를 견지한다. 하나는 모순율(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배중률(법칙)이다. 모순율에 따르면 어떤 명제 $p$에 대해 $p$와 $\neg p$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배중률은 $p$와 $\neg p$ 중 반드시 하나는 참이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먼저, 물리적 속성에 관한 명제의 진릿값을 어떻게 부여할지 예를 통해 정의해 보자. “입자 $a$는 영역 $R$ 안에 있다”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분법적) 측정을 통해 해당 명제가 참인지 결정할 수 있다고 정의하자. 이 측정은 이상적(잡음이 없고, 재현 가능한)이어야 하고, 결과가 두 가지 중 하나만 나오는 종류여야 한다. 여기서 “이분법적 측정”이라 함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를 산출하는 측정이 아니라, 단지 입자가 그 영역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두 가지 중 하나만 알려주는 측정을 말한다. 이러한 측정을 수행했을 때 반드시 결과가 “입자가 $R$ 안에 있다”고 나올 경우, 그 명제를 참으로 정의한다. 반대로 “입자 $a$가 $R$ 안에 있지 않다”는 명제는 같은 측정을 했을 때 결코 “안에 있다”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참이라고 정의한다.

이제 모순율의 원칙을 살펴보자. 이 원칙은 물리에 관한 명제를 다룰 때 반드시 시간의 맥락을 명시해야 함을 이미 암시해 준다. 예를 들어, 아무 수식어 없이 단순히 “계가 $R$ 안에 있다”와 “계가 $R$ 안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면, 이는 모순율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자연에서는 같은 계가 어떤 때는 $R$ 안에 있고 다른 때는 밖에 있는 경우를 실제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시간을 언급하여 명제를 한정해야 한다. 양쪽 명제에 “시각 $t$에”라는 말을 덧붙이면, 모순율은 만족된다. 특정한 동일한 시각에 대해서는 두 명제 중 하나만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한 명제를 “시각 $t_1$에”, 다른 명제를 “시각 $t_2$에”라고 달리 표기하고 $t_1 < t_2$인 경우, 두 명제 모두 참일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모순율 원칙은 동일한 시각의 명제들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이때 언급된 시간은 꼭 OT일 필요는 없고, 운동 방정식의 시간 좌표(GT)일 수도 있다.
이제 존재론적 불확정성이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고 여기에서 배중률의 법칙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살펴보자. 어떤 물리 이론을 가정하고, 그 이론에서 (순수) 상태를 위상 공간의 유한한 부피 영역 $\Delta$로 표현한다고 하자. (한 점으로 표현되는 경우와 대비된다. 즉, 이 경우는 단순히 지식의 결여로 인한 불확실성이 아니라, $\Delta$ 영역으로 표현되는 현재 상태에 담긴 정보가 그 계의 모든 속성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 충분하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헌을 참조하라.) 앞서 주장했듯이, 이러한 존재론적 불확정성은 일반적으로 계의 미래 진화에 비결정론을 야기한다. 실제로 적분가능한 고전 동역학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렇다. 따라서 미래 속성에 대한 진술은 일반적으로 참도 거짓도 아닌 상태가 된다. 왜냐면 그것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결정되는” 과정에 OT가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존재론적 불확정성이 있는 경우 다치 시제 논리(multivalued tensed logic)를 도입해야만 한다. 이 논리에서 어떤 명제는 이미 결정되어버린 순간에만 참이나 거짓의 값을 갖고, 그 이전까지는 불확정(indeterminate)이라는 제3의 논리값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다치 논리에 대해서는 문헌 등을 참조하라.) 예를 들어, 진짜 난수 생성기가 한 비트 값을 (결정된 값으로) 출력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출력된 값이 0이었다면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각 \(\tau_0\)를 정의할 수 있다. 이 OT의 순간 \(\tau_0\) 이후에는 명제 \(b=0\)은 참이며 \(b=1\)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두 명제 모두 “불확정”인 진릿값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배중률 원칙의 붕괴를 의미한다. 배중률의 실패는 모든 구성적 수학(constructive mathematics)ㅡ예컨대 직관주의ㅡ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본문에서는 정통 직관주의 논리에서의 창조적 주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새로운 정보가 우주에서 자연적 과정으로 생성된다는 자연주의적 직관주의 입장을 지지한다. 정통 직관주의 논리는 (괴델에 의해 증명되었듯이) 3진 논리도 다치 논리도 아니라는 점, 그리고 논리적 명제들은 대개 시제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마지막으로, 현 상태가 위상 공간의 유한한 부피 영역으로 표현되는 계를 생각해 보자 (그림을 참조). 이는 비록 그 상태가 (실수값들의 집합으로 표현되는 경우처럼) 모든 정보를 완전히 결정된 형태로 담고 있더라도,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계가 현재 시점에 영역 $R$ 안에 있다”는 진술은, 배중률 원칙이 현재에 대해서도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 거짓이다. 왜냐하면 “계가 현재 $R$ 안에 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참인 유일한 진술은 “계가 현재 시점에 $\Delta$ 안에 있다”는 것뿐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반대로, “계가 (어떤 미래 시각에) 영역 $R$ 안에 있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현재 시점에서는 불확정적이다. 그 이유는, 계가 나중에 (위상 공간에서) 더 국소화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계의 시간이 전개되어 실제로 미래의 상태가 결정되면 그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이 OT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배중률 원칙의 실패는 오직 미래에 대한 진술에만 해당되며, 여기서 말하는 미래란 OT의 변화로 식별되는 시점을 뜻한다.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
우리는 세상 모든 곳에서 시간의 한 방향성(directionality)을 관찰하는데, 왜 미시 세계의 물리법칙은 시간반전 대칭을 갖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이것은 통계적으로 설명된다. 즉, 엔트로피라는 열역학적 양은 고립계에서 감소할 수 없다는 (열역학 제2법칙) 사실 때문이다. 관측되는 시간의 비대칭성과 미시법칙의 시간 대칭 사이의 긴장은 Loschmidt paradox나 Poincaré recurrence theorem에 반하는 볼츠만의 H-theorem 등의 형태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이 (심지어 고전적 수준에서도) 반드시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B. 드로셀(B. Drossel)과 G. 엘리스(G. Ellis)의 여러 연구가 이를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본문에서 제시한 OT와 GT의 구분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사건이 있어 OT를 요구하게 된다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존재하게 되고, 이는 제2법칙이 함축하는 바와도 부합한다. 물론 이 주장 또한 (고전적이든 양자적이든) 측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하지만 Loschmidt나 Zermelo의 역설 같은 경우 푸앵카레의 정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지적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