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우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철학자가 존경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머릿속에서 분명해지도록 하려면 그것들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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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살아가면서 얻는 것이 무한한 고통뿐이라면,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굉장히 순수한 질문인데, 카뮈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소설가라 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인구의 20%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왜 자살하게 되는가? 자살의 원인은 생각보다 훨씬 본질적인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런 원인을 연구한 사회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살의 원천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살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면’ 인간은 자살하게 된다. (라고 당장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사람이라면 살면서 한번쯤은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 단순히 목표에 실패했다거나 재난 혹은 거금의 경제적 손실을 경험한 뒤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별개로, 인간 실존을 고찰하면 결과가 좀 허무적이다.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던져져서 존재만으로 고통받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존재와 삶에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보통 선택지가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1]그 진실을 외면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그 진실에 직면함으로써 얻게 되는 고통에서 탈피하거나 해소되거나 도피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바이닝거와 더불은 [2]의 대표 주자이다. 바이닝거는 22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천재가 아니면 죽는 것이 낫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천재가 아니었던 그의 현실이 그런 이상과의 괴리를 만들었고, 결국 바이닝거는 본인의 믿음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몸소 자살했다. 류노스케는 “광기에 가까운 예술이 평범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한 계기로 가정이 꾸려지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자 그는 평범한 이들로부터 아름다움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결국 본인의 신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다가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믿음과 현실 간의 모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파괴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1]을 선택하는 것보다 졸렬하고 비겁한 짓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관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근데 왜 인간적으로 살아야 하지? 인간적인 게 뭘까?). 이들은 마치 결코 도달 불가능한 태양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밀랍 날개를 만들어서 하늘을 날다가 추락해버린 이카루스 같다. 하지만 만약 류노스케가 자기파괴를 감당하지 않았다면 본인의 존재 가치였던 예술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부순 다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쌓아 올려야만 했을 것이다…


자살: 체제에 순응하기?

사람이 자살하는 방법과 경위는 다양하다. 그냥 주변 도구를 이용해서 감행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죽음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자살을 감행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당장 삶이 고통스러워도 목숨을 끊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는 사람들도 많고,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는 행위의 성공률이 낮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보자:

[1] 전시 상황에서 적군에게 발각되어 고문당할 위기에 처하자 권총 자살을 한 군인. |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여자.
[2] 부모님으로부터 교육적인 압박을 받게 되자 유서를 작성하고 아파트 고층에서 투신 자살을 한 특목고 학생. |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학교 옥상에서 투신 자살한 중학생.
[3] 어느날 갑자기 발병한 원인모를 피부 질환으로 인해 영구적인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자 음독 자살을 한 연예인. | 동성애가 불법인 중동 국가에서 동성애자 애인과 함께 동반 자살한 무슬림.
[4] 학자를 지망했으나 공부량에 비해 학습 수준이 크게 떨어지자 지능검사를 받았더니 IQ가 70이라는 것이 밝혀져 운명을 비관하다 목맴 자살을 한 대학생. | 자신의 추한 외모를 비관하여 전신을 난도질해 자살한 20대 여성.
[5]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고 자립할 능력이 부족해 사회적으로 완벽히 고립되어 살다가 독방에서 자살한 30대 히키코모리. | 나이가 많고 가족도 없어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무료한 삶을 영위하다가 음독 자살을 한 80대 무연고자.

[1]~[5]의 공통점은 ‘현재 겪고 있는 신체적·정신적 고통 및 허무나 다가올 고통에 대한 공포 및 두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라는 것이다. [1]의 경우 예견된 고통에 대한 정신적 두려움 혹은 이미 겪은 고통에 대한 심리적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고, [2]는 외부 환경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에 의한 고통으로 인한 것이고, [3]은 고치거나 바꿀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을 억압하는 개선 불가능한 환경으로 인한 것이고, [4]는 고치거나 바꿀 수 없는 신체적 조건에 의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것, [5]는 삶에의 의지 상실과 그에 따른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것이다.

자살적 사고의 요인 중 하나인 환경적 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가령 [1]졸병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2]아이가 어떤 부모 슬하에서 태어날지를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으며, [3]갑자기 발병한 질병이 저절로 낫기를 바라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4]외모는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죠. [5]의 경우 심리적 상태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외부에서 단순히 물리적인 자극을 줘서 이러한 자살적 사고를 변화시키기에는 사람의 사고 체계라는 것이 너무 복잡하다는 문제가 있다. 한 사람의 사고 방식을 전환시키려면 그 사고 체계를 정교하게 건드려 주어야 하는데, 약물은 그러한 충동성 사고 체계를 억제해주는 임시방편 정도일 뿐이고, 전문가와의 상담도 매우 오랜 시간과 경제적 비용을 투자해서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튼 [1]~[4]와 달리 [5]는 직접적인 물질적 원인이나 합리적 정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열한’ 자살 경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심리적 요인에 의한 자살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병원 가라”, “약 먹어라” 식의 태도를 가지는 건 상당히 무책임한 조언이긴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는 [5]에 속하는 케이스에 대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혹은 ‘너 스스로 해결해라’라고 말해주는 것 밖에는 그 자살 사고를 전환시켜줄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심리적 요인이라는 게 여타 요인들과 다르게 본인 스스로, 그리고 오로지 본인 스스로만이 해결 가능한 문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고민을 해봤는데, 우울증적 사고는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영역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우울한 감정은 순간적인 지적 판단 및 수행 능력을 저하시키기 때문입니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살예방을 위해 투입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과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할 경우 얻게 될 기회비용’을 비교해보게 될 수 있는데, 사실의 측면에서 볼 때 우울증 환자의 생존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울증이라는 게 마치 전염병 같은 존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우울증 있으면 남들한테 피해를 주니까 자살하는 게 낫다” 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당위의 측면에서 볼 때 자살이 허용 가능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합리성’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살의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는 연구들의 문제점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다 보니까 생각하게 된 지점이, 애초에 ‘윤리적으로 옳은 것’의 기준이 대체 뭐길래 자꾸 윤리적으로 판단하라고 요구를 하는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하등 쓸모가 없다. 그러니 이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그냥 죽여도 된다” 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은 현시대에는 거의 없습니다. 저희는 살인이 ‘잘못된 것’이라고 배웠고, 법에서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에, 사람을 별 이유 없이 살인하겠다고 주장하면 도덕적인 잣대에 의해서 몰매를 맞고 법적 처벌도 받습니다. 그러면 살인이 ‘나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 걸까요? 애초에 여기에 대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찾으려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세상이라는 게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니…차라리 논리성이 아니라 정당성에 치중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당화의 기준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인권’이 될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인권을 대체 왜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라고 또 묻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그냥 인권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가 지금 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라고 밖에 못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도덕률ㅡ사람의 행위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ㅡ이 그냥 현시대의 규정일 뿐이라는 뜻이 되는 걸까요? 윤리학에서는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 같은데, 절대적인 선악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보는 셈입니다. 왜냐면 어쨌든 윤리라는 게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지’를 판가름하는 잣대인데, 일단 그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는 게 있어야지 가치 판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100년 전 나치 독일에서는 “장애인들은 질병이 있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하등 쓸모가 없으니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죽여도 된다”라는 게 도덕이었는데, 미국에서는 그게 도덕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즉 도덕적 선은 집단마다 다 다를 수 있는 것이지만,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합의 및 준수할 만한 절대적 당위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최대한 그 윤리에 수렴하는 사회를 구성하자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이 나쁜 것인 이유는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했고,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는데, 그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 인권이기 때문에,” 정도로 정당화해야 하는 건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국에는 <현재 사회의 질서를 결정하는 힘을 가진 체제에 순응해라>라는 소리 아닌가요…? 말마따나 2차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승리했다면 지금의 윤리를 결정하는 힘은 나치즘을 따를 테니 ‘장애인 죽이기’가 윤리적인 정답이었을 것이고, 그러면 나치 독일이 승리한 세계에서는 ‘장애인 죽이기’라는 규칙에 순응하는 게 옳은 행동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자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본다면, 어쨌든 결국에 자살은 현대 인권에 위배되는 행위의 일종이고,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순응해야 하므로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게 되는 걸까요? 사람이 자기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에는 환경적인 요인과 심리적인 요인이 매우 큰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인권이 윤리적 잣대에 속한다고 해도 그게 당위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데, 왜냐하면 인권이 인간 개인의 경험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인과 심리적 요인을 결정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